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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억

2012년 12월 18일

바람이 차가워 지더니 방이 무척이나 건조해졌다.

특히나 방이 무척이나 건조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 얼마 전 선물로 받은 시계 때문일 것이다.

 

기온과 습도를 알려주는 시계.

습도계의 바늘은 습도30%를 향해있고,

건조함을 몸이 느끼기 전에

먼저 눈을 통해 그것을 인지하고 있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샤워를 한 후에

바디로션을 꼭 챙겨바르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려워서 피부를 벅벅긁어

혹사 시키기 때문이다. 

 

-우리 할아버지 얘기를 잠깐 하자면,

현재나이 89세로 일본군대를 무려 두 번이나 끌려갔다 오시고,

국군 부사관생활까지 총 3번 군생활을 하신 분이다.

아무도 아흔으로 보지않을 정도로 정정하신 할아버지는

모기에 물리면 벅벅 긁어서 상처를 낸다음

그곳에 물파스를 찍어바르는 진정한 남자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말로 '가려움 병'이 있다.

샤워 후에 항상 로션을 몸에 발라야 한다고,

젊은 나도 그러지 않으면 가려워 죽겠다고 말씀드려도 소용 없다.

땡전 한 푼 없이 5형제를 길러 내신 분이다.

 

"할아버지 요즘 허리는 어때?" 

"응. 허리는 괜찮은데 이놈의 가려움병 때문에 가려워 죽겠어 아주"

낡은 텔레비전 선반 위로 먼지 가득한 바디로션이 보인다.  

할아버지는 매주 월요일, 병원에서 '가려움 병' 주사를 맞고 오신다.-

 

술을 미친듯이 마시고 온 어느 날,

머리를 감으며 몸에 물만 끼얹고 그냥 잔 적이 있다.

그날은 마침 기록적인 한파에 건조주의보 까지 겹쳐진 날이었다.

나는 샤워를 즐겨하는 편인데, 샤워라기 보다는 거의 목욕에 가깝도록

한참이나 물을 맞고 있는걸 좋아한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렇게 장시간 샤워를 하면

몸에서 수분이 엄청나게 빠져나간다고 한다.

나는 지금까지 물을 많이 맞으면 맞을수록

그만큼 체내 수분이 증가 되는줄 알고 있었다.

 

여하튼 그렇게 자고 일어났더니 아니나 다를까 몸이 바싹 말라 있었다.

꿈에서 얼굴을 진짜 심하다 싶을 정도로 벅벅 긁었는데

거울을 보니 꿈이 아니었나보다.

이놈의 성질에 가려운걸 가만히 놔두질 않았던 것이다.

얼굴이고 팔이고 어찌나 긁었는지 온통 씨뻘겋다.

말도 못하게 열받는건,

그렇게나 긁었는데도 계속 가렵다는 것이다.

 

'포멧'을 해야겠다.

컴퓨터를 장기간 사용하다 보면

이런저런 파일 찌꺼기들이 쌓여 엄청나게 느려진다.

그럴때 마다 포멧을 하면 깔끔한 새PC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데,

컴퓨터에 그런 포멧 기능이 있다면 내 포멧은 바로 '목욕'이다.

 

시설 좋은 고급사우나도 좋지만,

이렇게 혼자 '포멧'을 하러 갈때는 주로 동네에 있는

오래된 대중목욕탕을 즐겨 찾는다.

 

작은 통에 샴푸를 옮겨담고,

로션과 바디로션을 점퍼주머니에 쑤셔넣고 집을 나선다.

한창 어릴적엔 이렇게 집에서 뭘 챙겨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목욕탕 쓰레기통엔 반도 넘게 남은 샴푸와 때수건들이 가득했다.

씻어서 쓰면 그만이었는데 이제 그럴 나이는 지났나보다.

 

너무도 추운 겨울이지만 이럴땐 왠지

슬리퍼를 질질 끌고가야 제맛이다.

계산을 하고 탕에 들어서자 구릿한 냄새가 나를 반긴다.

어떻게 보면 목욕탕은 썩 그렇게

위생적인 공간만은 아니다.

위생을 위해 위생적이지 않은 공간을 다녀 온다라...

이상한 일이다.

 

샤워를 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어르신 몇 분과 온몸에 시커멓게 문신을한 돼지들과

땅꼬마가 낄낄대며 씻고있다.

그쪽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됐는지 순박하게 웃는 얼굴과

지저분하게 그려진 문신이 매치가 안된다.

나보다도 한참이나 어려보인다.

 

어찌됐건,

나는 일단 온탕, 열탕, 사우나, 냉탕 코스를 밟아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온탕으로 간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따듯함이

마치 몸을 녹일것만 같은 온탕을 상상하며 발을 담그는데,

이런 젠장.

온탕의 온도가 열탕보다 더 뜨겁다.

간혹 이런일이 있는데 그 이유는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놈들이

대중탕에와서 자기 개인탕을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그것이다.

왠만큼 뜨거운물도 아무렇지 않게 들어갈 수 있지만

이건 정말 너무한 온도였다.

오죽하면 지나가던 목욕관리사에게

도대체 물이 왜이렇게 뜨겁냐며 따졌을 정도다.

심지어 열탕은 더 뜨거웠다.

차가운 물을 틀어 온도를 맞출 수도 있겠지만

개인탕을 만들어 놓은 그놈이 이미 뜨거운물을 끝까지 받아놓은 상태라

물이 줄줄 흘러 넘치게 찬물을 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어떤 뜨거운물도 견뎌낸다는 어르신들 마저

열탕에 종아리까지만 담그고 걸터 앉아계신다.

 

목욕탕에 가는 이유는 바로 이 탕을 이용하기 위함인데

이건 도저히 즐길 수 가 없는 온도다.

포기하고 싸우나에 들어간다.

싸우나에 앉아서 인간의 끝없는 이기심에 대해 잠시 생각한다.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말은 이미 먼 옛날부터 나오던 말인데,

수백년이 지난 지금은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을 것이니

언젠가는 곪아 터질때 까지 곪아 문제가 터져버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열받아 하고 있을때,

싸우나 창문으로 목욕탕에 들어서는 부자가 보인다.

곧, 많아야 여섯살 정도 되는 꼬마가

장난감을 잔뜩 안고 탕에 들어선다.

망했다. 

 

아니나 다를까 꼬마는 재빨리 샤워를 마친 뒤 온탕으로 돌진한다.

아빠가 샤워를 시키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탕으로 들어갔을 기세다.  

장난감을 들고 온탕에 손을 담그는 순간 

아이의 표정이 굳는다. 

 

짜증나게 웃긴 상황,

꼬마는 깜짝놀라 울면서 아빠에게로 뛰어간다.

너무도 웃기지만 짜증나는 상황에서 나는 다시

나와 꼬맹이의 '목욕'을 망친 온탕 테러범을 마구 욕한다.

 

힐링.

누구에게나 어느곳에나 어떤식으로든지 힐링은 반드시 필요하다.

힐링은 그대로 치료일 수도 있고, 재기 내지는 전환점일 수 도 있다.

쉴 틈 없이 각박하고 찌든 세상에서

우리는 누구보다 힐링을 원하고 있다.

다들 그렇게 힐링하고, 지치고 또 다시 힐링하며 살아간다.

뭐가 그렇게 힘들고 지쳤었는지

문득, 감히 이런게 인생인가 싶다. 

 

나는 그냥 다같이 행복하고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능력이 된다면 거대한 리조트를 만들어야 겠다.

그곳에서 만큼은 누구나 행복하고 즐거울 그런 힐링 공간 말이다.

 

꼬마야 나중에 삼촌네 리조트에 놀러와라.